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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준| 2009. 8. 12. 00:22


보는 자는 그가 보고 있는 것에서 포착되기 때문에 그가 보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즉 모든 봄에는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이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보는 자는 그가 수행하는 봄을 사물들을 대리하여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행하는 것이고, 흔히 많은 화가들이 말하듯이 나는 내가 사물들에 의해 주시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며, 나의 능동성은 수동성과 동일한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비해 이차적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심오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거주하고 있는 내 몸을 보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몸[물체]의 윤곽을 바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몸[물체]에 의해 보인다는 것, 그 몸[물체]속에서 존재한다는 것, 그 몸[물체]로 이주한다는 것, 그 몸[물체]의 환영에 의해 유혹되고 매혹되어 자신을 양도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서로 환위된다는 것, 따라서 어느 것이 보는자이고 어느 것이 보이는 자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거대 가시성이고 거대한 감각적인 것 자체의 그 일반성이고 우리가 이제까지 살chair이라 부른, 대자아 자신으로부터 태어나는 그 익명적 존재이다.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이를 지시할 어떤 이름도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을 소립자들이 결합되거나 연속되어 형성되는 것으로 볼 때, 이렇게 존재하는 것들의 소립자들을 일컬어 물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살은 이러한 의미의 물질이 아니다. 가시적인 것(내 몸과 마찬가지로 사물들)은, 사실적으로 존재하면서 사실적인 나의 몸에 작용을 가하는 사물들에 의한 존재자에게로 회부될 (어떻게 그런지는 아무도 모르지만)법한 "심리적인" 질료들도 아니다. 이 "심리적인" 질료들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일반화시켜 말하면 가시적인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가시적인 것은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사실들의 총합이 아니다. 더욱이 가시적인 것은 정신에게 주어지는 표상이 아니다. 즉 정신은 자신들의 표상들에 의해 매혹될 줄 모른다. 그리고 정신은 보는 자에게 본질이 되는, 가시적인 것에로의 이러한 삽입을 싫어한다. 살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다.




- 본다는 것은 제 스스로 드러나는 존재자들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존재자들이란 것들이 서로서로의 뒤에 혹은 내 뒤에 숨겨질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드러날 수도 없다. 달리 말하면 한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대상에 거주하러 가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그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가에 따라 그 다른 사물들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다른 대상들을 함께 보는 한, 그것들은 나의 시선에 열린 채로 머물러 있게 되고 - 이때 내 시선은 그것들에 잠재적으로 위치해 있다- 나는 이미 여러 다양한 각도에서 현실적인 나의 봄의 중심 대상을 파악한다. 그래서 각각의 대상은 다른 모든 대상들의 거울이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 몸의 세계, 세계의 몸-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