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서문네 집에서 아이들과 늦은 아침을 먹고 뒹굴거리다가 보았던 언페이스풀. 지겹도록 얘기해도 모자라지 않은 건 불륜영화가 왜 여자들의 가슴에 기묘한 낭만을 불태우는지; 나에게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제일먼저, 또렷하게 가르쳐준 영화기 때문인 것 같다. ㅎㅎ 아무튼 그 불륜영화의 결말은 참 거시기했으나 애드리안 라인의 서정적인 카메라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처음 만나는 두 남녀의 어색하고도 호기심어린 시선, 상처가 난 여자의 다리를 치료해 주는 남자의 조심스러운 손끝, 여자에게 주기 위해 따뜻한 차를 컵에 따르는 그 소리마저 유혹적이었다. 굉장히. 그렇게 연출하는 것도 능력이야. 그러나 이런 시선이 로리타를 비췄을 때는- 글쎄요오. 확실히 그 사람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수긍할만한 것이긴 해도.
원래 92년과 62년의 '로리타' 그 자체에 대해서만 말하려고 했는데 왠지 또.... 포스팅 내용은 내 의도와 다르게 딩요네 별로 날아가버릴 것 같은 예감. 늘 그렇지 뭐. =_ = ; 그러나 아무튼.

1 이런 묘사는 애드리안 라인의 특기....
에로틱한 긴장감.
에로틱한 긴장감.


사실 원작을 읽은 게 재작년이라 내용의 디테일은 기억이 잘 안나지만;; 62년의 로리타가 훨씬 원작과 가깝다고 느껴진다. 소녀와 성숙한 여인의 중간지점에 있는 신비한(주인공 아저씨 눈에는) 존재. 풍파많은 세상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아니, 드러나면 안 되는 순수. 하지만 이 순수를 자신만이 소유해야 한다고 믿는 아저씨의 삐뚤어진 욕망. 화려하게 만개하기 직전의- 마치 달콤한 무언가를 볼이 빵빵하게 입안 가득 물고 있는 꽃봉오리를 바라보는 심정같은 걸지도 모른다. 저것이 터진다면, 기쁨과 탄성과 슬픔- 그러나 오직 나의 품에서.
92년작 역시 원작을 읽었던 재작년에 봤었고 당시에는 그녀를 보며 '예쁘다' 생각했지만 62년의 로리타를 보니 92년의 그녀는 따라잡을 수가 없는 매력이 있다. 캐스팅의 승리라고 해야하나?;; 흑백 스크린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느껴지는 육감적인 금발소녀. 되바라지고 예의 없으나 타고난 色으로 타인을 사로잡는. 내가 막연히 생각하던 로리타의 이미지와 많이 가깝다. 결말 쯤에 다시 만난 험버트에게 "오 제발, 그만 좀 울어요!" 하는 냉정함도 상당히 어울린다. 그러나, 나도 지금에서야 느끼지만 애드리안 라인의 로리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로리타 컴플렉스의 전형. 62년에 비하면 훨씬 꼬꼬마란 말이다.<-




그녀는 이런 춤도 춰요.

로리타의 어머니 샬롯.
짧은 시간 굉장한 인상을 남기고 사라진 캐릭터.
(62년에서만)

어쩌면 이런 느낌의 차이는 배우의 비주얼 뿐만 아니라 로리타를 보는 험버트의 시선, 혹은 원작 로리타를 연출하는 감독의 시선 탓도 있을지 모른다. 부연설명을 더 해야할 것 같은데 살짝 귀찮다.;; 역시 귀찮음의 이유로 92년작을 다시 보진 않았지만;; 애드리안 라인은 애드리안 라인답게 확실히 로리타와 험버트의 애정'행각'에 중점을 두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면 그닥 중점을 찍지 않았어도 워낙 연출을 그 방면에 인상깊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무지한 관객이 알아들은 건 그것뿐일지도) 큐브릭은 큐브릭답게 험버트라는 캐릭터에 좀 더 집중했고 관대하게도 로리타의 어머니 샬롯 캐릭터도 집중해주셨다. 92년과 비교하자면,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본다. 샬롯은 절대로 그냥 지나가는, '로리타를 차지하기 위해 험버트가 넘어야할 귀찮은 장애물' 정도로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샬롯의 우연찮은 죽음으로 험버트는 물론 죄책감은 있으나 이것이 로리타를 차지할 수 있는 신이 주신 기회- 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이것도 내 희미한 기억에 의지한 거긴 하지만;) 그리고 그 후 험버트는 완전한 나락의 길을 걷게 되니까.

한쪽에는 총, 한쪽에는 로리타.
험버트는 저 총으로 샬롯을 죽이려했고 그 총의 방아쇠를 당기게 한 건 로리타.
험버트는 저 총으로 샬롯을 죽이려했고 그 총의 방아쇠를 당기게 한 건 로리타.
영화를 처음 보고나서도 그랬고 지금 생각해봐도 그렇고, 92년작 마지막에 험버트, 미중년 제레미 아이언스가 슬픔에 정신이 나간 채 운전하다가 사고로 죽지 않았던가? 이미 피도 흘리고 있었지만. 그 비틀거리는 카메라, 뿌연 화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신병자로 취급될 수 있는 한 남자의 고통을,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좀 궁금하다면 62년작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네이버 영화를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애드리안 라인의 로리타가 별점 9점대, 큐브릭의 로리타가 별점 7점 대다. 역시 그는 뭘 아는 감독님인듯. <-
# 나가야 되는데 나가기가 귀찮아서 이러고 있네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