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책을 읽죠?
그게 내 직업이거든.
이상하군요.
갑자기 무슨말을 하는지 저도 모를때가 있어요. 가끔 그래요.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알아요. 그게 정확한 의미인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요.
하지만, 말하려는 순간이 되면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요.
'삼총사' 읽어봤소?
영화는 봤어요. 왜요?
그 안에 폴토스란 인물이 나오는데, 이건 정말 20년 후에도 있는 얘기지만
폴토스, 키 크고 강하고, 약간은 멍청하지.
그는 인생에 대해 결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가 지하실에 폭탄을 가지고 가서 폭탄을 터트리는데
심지에 불을 붙이고 그 다음엔 도망가야하는데 갑자기 그는 생각을 한거요.
뭣 때문에? 한 발을 떼기전에 다른 발을 드는게 가능하기나 한가?
그래서 그는 뛰는 걸 멈추고, 앞으로 계속 갈 수가 없게 됐소.
폭탄이 터지고 지하실이 무너져버리자 그는 어깨로 떠받쳤지.
하지만 하루가 지나서, 이틀인가..아무튼 눌려 죽게 되요.
처음에 그는 생각을 했소.
그 생각이 그를 죽였지.
왜 저한테 그런 얘길 하는거죠?
이유는 없어요. 그냥 얘기한거요.
왜 사람들은 얘기해야 하죠?
어떤 사람들은 얘기하지 않고, 조용히 살아요.
말이 많을 수록, 의미는 더 적어져요.
그럴수도 있겠지....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우린 말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어요.
전 말하지 않고 사는게 좋아요.
그래, 그게 좋을 수도 있지.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한다면 모를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오.
왜요?
단어란 건 단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우릴 속이는 건가요?
그러나,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거요.
사람은 글을 쓰는 것으로써 자신을 표현해왔어요.
생각해봐요. 플라톤 같은 사람은 아직도 이해될 수 있어요.
할 수 있죠.
2500년 전에 그리스어로 썼지만 아무도 그리스어를 잘 알진 못해요.
적어도 정확히는 모를거요.
그러나 그 책을 통해 뭔가는 이해 되잖아요.
그래서 우린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거예요.
우린 그래야 되요.
왜 그래야 되죠? 서로를 이해하는거 말이에요.
우린 생각을 해야 되고 생각하기 위해 단어가 필요한거요.
그것 말고는 생각할 다른 방법이 없어요.
의사소통을 하려면 사람은 얘기를 해야되요. 그게 우리 인생이오.
그래요. 하지만 꽤 어렵네요.
인생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삼총사'에 대한 것이 좋은 이야기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끔찍해요.
하지만 거기에서 배울 건 있어요.
난 믿어요.
사람들은 잠시 인생을 단념할 때만 말 잘하는 걸 배우지.
그게 댓가라는 거요.
그럼 말 하는게 운명이네요?
말하는 건 삶에 연관된 부활에 가까워요.
사람들이 말하지 않을 때부터 다른 인생이 되는거지.
그래서, 말하며 살기 위해선 말하지 않는 인생의 죽음을 빠져나와야 하는거요.
정확히 알아듣게 얘기할 수 없겠지만
말 잘하는 것을 금지하는 고행 중 하나라는 거죠.
초연한 인생을 바라볼때까지.
하지만 일상생활을 그렇게...살 수 없어요.
초연하게?
단어의 침묵을 통과하려면 중심을 잡아야 해요.
우린 두가지 사이에서 흔들리죠. 그게 인생의 할동이거든.
일상생활에서 인생으로 올라가는 사람을 우린 초월자라고 부르죠.
생각하는 인생 말이에요.
하지만 생각하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매일 죽어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해요.
아주 기본적인 인생이 되는거지.
그렇다면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은 같은 건가요?
그렇게 믿고 있어요.
플라톤은 그렇게 말했죠. '그건 옛 이데아다.'
사람은 표현하고자 할 때, 단어에서 생각을 구별해낼 수 없어요.
생각하는 그 순간은 단어를 통해서만 잡을 수 있죠.
그래서 사람은 말을 해야하고, 위험한 거짓말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거짓도 우리 탐구분야지.
오류와 거짓은 아주 비슷해요.
통상적인 거짓말을 의미하는 게 아녜요.
내일 간다고 약속한다 칩시다. 하지만 안 간다면,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게 책략이라는 거죠.
하지만 교활한 거짓은 오류와는 약간 달라요.
적당한 단어를 찾아보지만, 발견할 수 없어요.
그건 무슨 말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죠.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두려워 했어. 그래야 설명이 돼요.
사람들이 적당한 단어를 찾는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요?
일을 해야한다면 노력이 필요해요.
올바른 방법으로 말을 하게 되면 상처를 주지 않죠.
말하고자 하는 걸 말하고, 하고자 하는 걸 하는거예요.
상처나 흉터 없이.
사람들은 참된 믿음속에서 살려고 애를 쓰죠.
누가 저한테, '진리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심지어 오류속에도.' 라고 말했어요.
사실이예요.
프랑스 사람들은 17세기동안 그걸 보지 못했어요.
오류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오류가 많을 수록, 진리속에 살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건 불가능해요.
그래서 칸트, 헤겔 같은 독일 철학자들이 인생의 뒷편으로 우리를 데려가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오류를 통과함으로써, 우리가 바로 볼 수 있게 했죠.
사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사랑속에는 육체라는 것이 들어가야 했어요.
라이프니쯔는 우연한 일이라고 소개했죠.
우연한 진리와 필요한 진리가 인생을 구성하는 거예요.
독일 철학자들은 그걸 보여줬어요.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인생의 오류와 노역을 함께 생각하죠.
사람들은 그걸 관리해야 했어요. 그건 사실이지.
사랑이 유일한 진리가 아니란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사랑은 항상 진실이 되어야 해요.
사랑하는 것을 그 즉시 바로 아는 사람을 본 적 있소?
없어요. 20살이 되도, 당신은 모를거요.
당신이 알고 있는 건 아주 조금이고 조각들이예요. 당신은 임의로 선택을 해야 돼.
당신이 말하는 '난 사랑해요' 라는 건 불순한 사건이오.
하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것과 함께 완전하게 될려면 당신은 성숙이 필요해요.
그건 탐구를 의미하는 거지...이게 인생의 진리요.
그래야 사랑은 해결이 되고, 사랑이 진실인 상태가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