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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12.31 제임스 앙소르. (James Ensor) 1

Vivre sa vie

Play 2007. 12. 3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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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책을 읽죠?



그게 내 직업이거든.



이상하군요.

갑자기 무슨말을 하는지 저도 모를때가 있어요. 가끔 그래요.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알아요. 그게 정확한 의미인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요.

하지만, 말하려는 순간이 되면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요.

'삼총사' 읽어봤소?



영화는 봤어요. 왜요?



그 안에 폴토스란 인물이 나오는데, 이건 정말 20년 후에도 있는 얘기지만

폴토스, 키 크고 강하고, 약간은 멍청하지.

그는 인생에 대해 결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가 지하실에 폭탄을 가지고 가서 폭탄을 터트리는데

심지에 불을 붙이고 그 다음엔 도망가야하는데 갑자기 그는 생각을 한거요.

뭣 때문에? 한 발을 떼기전에 다른 발을 드는게 가능하기나 한가?

그래서 그는 뛰는 걸 멈추고, 앞으로 계속 갈 수가 없게 됐소.

폭탄이 터지고 지하실이 무너져버리자 그는 어깨로 떠받쳤지.

하지만 하루가 지나서, 이틀인가..아무튼 눌려 죽게 되요.

처음에 그는 생각을 했소.

그 생각이 그를 죽였지.



왜 저한테 그런 얘길 하는거죠?



이유는 없어요. 그냥 얘기한거요.



왜 사람들은 얘기해야 하죠?

어떤 사람들은 얘기하지 않고, 조용히 살아요.

말이 많을 수록, 의미는 더 적어져요.



그럴수도 있겠지....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우린 말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어요.



전 말하지 않고 사는게 좋아요.



그래, 그게 좋을 수도 있지.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한다면 모를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오.



왜요?

단어란 건 단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우릴 속이는 건가요?



그러나,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거요.

사람은 글을 쓰는 것으로써 자신을 표현해왔어요.

생각해봐요. 플라톤 같은 사람은 아직도 이해될 수 있어요.



할 수 있죠.



2500년 전에 그리스어로 썼지만 아무도 그리스어를 잘 알진 못해요.

적어도 정확히는 모를거요.

그러나 그 책을 통해 뭔가는 이해 되잖아요.

그래서 우린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거예요.

우린 그래야 되요.



왜 그래야 되죠? 서로를 이해하는거 말이에요.



우린 생각을 해야 되고 생각하기 위해 단어가 필요한거요.

그것 말고는 생각할 다른 방법이 없어요.

의사소통을 하려면 사람은 얘기를 해야되요. 그게 우리 인생이오.



그래요. 하지만 꽤 어렵네요.

인생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삼총사'에 대한 것이 좋은 이야기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끔찍해요.



하지만 거기에서 배울 건 있어요.

난 믿어요.

사람들은 잠시 인생을 단념할 때만 말 잘하는 걸 배우지.

그게 댓가라는 거요.



그럼 말 하는게 운명이네요?



말하는 건 삶에 연관된 부활에 가까워요.

사람들이 말하지 않을 때부터 다른 인생이 되는거지.

그래서, 말하며 살기 위해선 말하지 않는 인생의 죽음을 빠져나와야 하는거요.

정확히 알아듣게 얘기할 수 없겠지만

말 잘하는 것을 금지하는 고행 중 하나라는 거죠.

초연한 인생을 바라볼때까지.



하지만 일상생활을 그렇게...살 수 없어요.



초연하게?

단어의 침묵을 통과하려면 중심을 잡아야 해요.

우린 두가지 사이에서 흔들리죠. 그게 인생의 할동이거든.

일상생활에서 인생으로 올라가는 사람을 우린 초월자라고 부르죠.

생각하는 인생 말이에요.

하지만 생각하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매일 죽어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해요.

아주 기본적인 인생이 되는거지.



그렇다면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은 같은 건가요?



그렇게 믿고 있어요.

플라톤은 그렇게 말했죠. '그건 옛 이데아다.'

사람은 표현하고자 할 때, 단어에서 생각을 구별해낼 수 없어요.

생각하는 그 순간은 단어를 통해서만 잡을 수 있죠.



그래서 사람은 말을 해야하고, 위험한 거짓말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거짓도 우리 탐구분야지.

오류와 거짓은 아주 비슷해요.

통상적인 거짓말을 의미하는 게 아녜요.

내일 간다고 약속한다 칩시다. 하지만 안 간다면,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게 책략이라는 거죠.

하지만 교활한 거짓은 오류와는 약간 달라요.

적당한 단어를 찾아보지만, 발견할 수 없어요.

그건 무슨 말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죠.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두려워 했어. 그래야 설명이 돼요.



사람들이 적당한 단어를 찾는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요?



일을 해야한다면 노력이 필요해요.

올바른 방법으로 말을 하게 되면 상처를 주지 않죠.

말하고자 하는 걸 말하고, 하고자 하는 걸 하는거예요.

상처나 흉터 없이.



사람들은 참된 믿음속에서 살려고 애를 쓰죠.

누가 저한테, '진리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심지어 오류속에도.' 라고 말했어요.



사실이예요.

프랑스 사람들은 17세기동안 그걸 보지 못했어요.

오류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오류가 많을 수록, 진리속에 살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건 불가능해요.

그래서 칸트, 헤겔 같은 독일 철학자들이 인생의 뒷편으로 우리를 데려가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오류를 통과함으로써, 우리가 바로 볼 수 있게 했죠.



사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사랑속에는 육체라는 것이 들어가야 했어요.

라이프니쯔는 우연한 일이라고 소개했죠.

우연한 진리와 필요한 진리가 인생을 구성하는 거예요.

독일 철학자들은 그걸 보여줬어요.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인생의 오류와 노역을 함께 생각하죠.

사람들은 그걸 관리해야 했어요. 그건 사실이지.



사랑이 유일한 진리가 아니란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사랑은 항상 진실이 되어야 해요.

사랑하는 것을 그 즉시 바로 아는 사람을 본 적 있소?

없어요. 20살이 되도, 당신은 모를거요.

당신이 알고 있는 건 아주 조금이고 조각들이예요. 당신은 임의로 선택을 해야 돼.

당신이 말하는 '난 사랑해요' 라는 건 불순한 사건이오.

하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것과 함께 완전하게 될려면 당신은 성숙이 필요해요.

그건 탐구를 의미하는 거지...이게 인생의 진리요.

그래야 사랑은 해결이 되고, 사랑이 진실인 상태가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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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une|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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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면들에 둘러싸인 자화상 1899년, 캔버스, 유채>





무시무시한 유머와 그로테스크한 풍자로 가득 찬 가면과 해골의 드라마를 회화화한 벨기에의 앙소르는, 19세기 말에 프랑스의 르동, 고갱, 세잔, 그리고  고흐, 뭉크 등과 더불어 근대 회화사를 20세기로 돌리는 차축의 역할을 한 화가였다. 프랑스의 미술사가 르네 유이그는, 앙소르를 미술사상의 중추적 인물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이 예술가는 이따금 주변 화가로 간주되나, 실제로는 19세기 말에 고전주의적 및 라틴적인 정신의 붕괴를 예고한, 광범위하고 지적이며 미학적인 운동에 있어 한 주역을 맡았다.' 고 말한다.

 남구의 지중해에서 발생한 라틴 정신이 명쾌하고 균형적이며, 합리주의적이라고 한다면 북해의 변전하는 해변 오스텐드 시에서 일생을 보낸 앙소르는 음영 있는 정염, 반역적 정신, 부조리한 환상 등 반(反) 라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유 분방한 이단 정신에 넘쳐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성은 예술의 적이다. 이성에 의하여 지배되는 예술가들은 온갖 감정을 잃으며, 그들의 힘찬 본능은 약체화 하며, 영감은 빈곤화 하고, 그들의 심장은 그 생명의 마음을 잃는다... 모든 규칙, 모든 규범은 죽음을 토해낸다."



+) 어린 시절


제임스 시드니 앙소르는 1960년 4월 13일 벨기에의 오스텐드 시 롱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레데릭 제임스는 앙소르는 브뤼셀에서 태어난 영국인이었으며, 어머니 마리아 카타리나는 플랑드르의 전통있는 가문의 딸인데, 오스텐드 인이었다. 이듬해 8월에 제임스의 오직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 마리에트가 태어났다.


 오스텐드는 어부나 항만 노동자들의 소박하고 거친 성격을 지닌 한편, 여름철의 약 4개월은 외국에서 온 부유한 휴양객들로 흥청거리는, 경박한 국제적 소도시로 변모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도시에는 손님을 끄는 진귀한 물건을 파는 토산물 상점이 많았다. 앙소르의 양친은 물론이고 조부와 백부, 백모도 경영하고 있던 이런 가게는, 그의 유소년 시절부터의 환경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가게에 가득히 진열된 것은 갖가지 조개 껍데기, 동양의 골동품, 동인도 제도의 도자기, 유리 장신구, 동물의 박제, 범선의 모형, 꽃병과 인형 등이었다. 소년이 이따금 탐험하러 몰래 들어가는 어둠침침한 다락방에는 무서운 이국의 거미와 동물, 식물, 아름다운 도자기, 빨간 옛날옷, 붉은 산호와 흰 산호, 원숭이, 바다거북, 바싹 마른 인어, 중국 인형 등이 있었다. 앙소르가 홀딱 반해서 평생 동안 내내 가까이 두고 있은 기괴한 인어는 나무, 사람의 머리털, 물고기의 비늘, 원숭이의 이빨 등으로 만든 일본제였다고 한다. 그리고 카니발 때는, 보드지로 만든 알록달록한 가면, 번쩍거리는 장식류가 점두를 장식했다.


 이 야릇하고, 비일상적이요, 공상을 자극하고, 이국 정서를 자극하는 물건들은, 평소에 늙은 하녀가 얘기해 준 요정,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 악한 거인 이야기 등과 어울려서 어린 앙소르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고, 그의 백일몽을 꿈꾸는 경향이나 능력을 기르게 되었다. 가면과 그 밖의 물건들은 뒷날 앙소르의 화면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인공물들보다더 더 앙소르의 감성과 마음에 침투하고, 지배하고 그 자신도 평생 동안 내내 애착을 느낀 것은 오스텐드의 자연이었다. 바다의 사구와 항구를 그는 곧잘 산책했는데, 날씨가 변하기 쉬운 바다와 하늘은, 어떤 리듬을 가진 짐승처럼 빛, 색깔, 형태를 바꾸어 가며 그에게 자연의 신비를 감득하게 했다. 바다는 그의 위대한 영감원 이었다.


 "나의 생일에 비너스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는데, 두 사람은 상대방의 눈을 서로 오랫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선 상쾌한 소금 냄새가 났다." 고 앙소르는 말한다. 또 어린 시절의 어느 날 밤, 램프의 불빛에 끌려 커다란 해조 한 마리가 방 안에 날아 들어 그의 요람에 부딪쳤다. 그 때의 공포를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1877년 17세의 앙소르는 브뤼셀의 미술 학교에 입학한다. "나는 등록하자마자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시저 가문의 가장 유명한 옥타비아누스의 흉상을, 그 새 석고상을 보고 그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누같이 흰 석고상에 어리둥절 해졌다" 자연에서 얻는 감흥에 따라서만 그리고, 아카데믹한 미술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로써는 추삭적인 석고상은 그릴 기분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미술학교의 분위기는 앙소르의 마음을 얼어붙게 한 모양인지, "공포심을 품고 나는 너무나 필사적으로 나를 몰아대었다. 오전에는 그림을 그리고 오후에는 구도를 배우는 클래스에 출석했고, 저녁때는 데상을 했으며 밤에는 장래의 꿈을 상세하게 계획했다. 교사들은 나에게 편견을 품고는 불만스레 얼굴은 찡그리고 나를 어리석은 몽상가라고 경멸했다." 고 말하고있다.


 앙소르의 화업의 초기는 미술 학교 재학 중이었떤 1879년부터 1882년 까지의 몇 해동안이며 흔히 <어두운 그림 시절>이라고 불린다. 이 시기의 작품은 대개 기름물감을 두껍게 썼고, 색조는 흐르는 것처럼 풍성하고, 그리는 대상을 그 본질과 외관과 질감 등에서 리얼하게 파악하려 하고있다. 낭만적인 상징주의 냄새가 나는 작품도 있다. 이것들은 화가로서의 타고난 재능을 보여 주며 뒷날의 화풍에 비교하면 리얼리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풍이지만 그런데도 당시의 벨기에 미술계에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의 그림은 대상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자립한 조형적 질서를 만들어 내고, 옥외내 옥내에 있어서의 빛의 추구에 열심이며 또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에도 존재하는 신비를 캐내려는 경향이 있다.


1883년 10월 28일 옥타브 마우스가 브뤼셀에서 전위적인 미술 단체 <20>을 창설하였을 때 앙소르도 창립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했다. 당시는 벨기에가 독립한 지 약 반세기를 맞았으며 예술계의 새로운 정신과 기운을 대표하는 '젊은 벨기에','근대 예술' 등의 잡지도 창간되었다. 그리고 <20은> 해마다 회원들의 작품 뿐 아니라 마네로부터 쇠라에 이르는 프랑스 인상파, 신 인상파, 후기 인상파의 작품에 의한 전람회를 개최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리라당으로부터 베를레느의 시, 바그너로부터 라벨의 음악 등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의 전위 예술의 동향을 널리 소개했다. 이리하여 <20>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예술단체. (알프레드 H.버)" 였던 것이다. 1893년에 마우스는 <20>을 해산하고 새로 <자유 미학>(1894~1914)을 창설했는데, 이 두 단체가 금세기의 예술을 발전케 하는 모태로서의 세기말 예술에 이바지한 역할은 컸다.


 당연한 일이지만, 시대를 앞선 <20>에 대한 미술 저널리즘의 비평은 비난에 가득 찬 것이었다. "<20>은 벨기에와 외국의 작가를 초대했고....그들 가운데에는 쇠라, 피사로 같은 사기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개혁자는.....존재할 가치가 없다." 또 <반 고흐의 카니발 예술>이나 르노와르에 대해서는 "그의 야한 그림을 보면 팔레트가 빈곤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고 공격했다. 요컨대 <20> 전람회는 "참으로 덜 된 작자들의 전람회이며 그들은 공중, 예술, 좋은 취미, 좋은 풍습에 경멸의 마음밖에 품지 않는다."라고 간주된 것이다. 그리고 앙소르는 그들과 더불어 비난과 조소를 받는 영예를 얻었다. "사람들은 앙소르, 모네, 쇠라, 고갱 등과 같은 여러 작자들의 고약한 짓에 구역질을 느끼는데, 그들은 예술적 자유라는 핑계로 가장 메스꺼운 아틀리에의 오물(汚物)에 액자를단다." 특히 앙소르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의 표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믿었던 <20>의 그룹 안에서도 이단자로도 따돌림을 받기 시작한다.


1888년에는 <화장실의 소녀> <성 안토니우스의 고난> 과 그 밖의 작품들이, 이듬해는<브뤼셀 시에 입성하는 그리스도>를 포함하는 제출 작품이 거절당한 데다, <20>에서 제명마저제안 되었는데, 이것은 그 자신의 한 표로 간신히 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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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실의 소녀, 1886년, 캔버스,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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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토니우스의 고난, 1887년,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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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시에 입성하는 그리스도, 1888년, 캔버스, 유채>







+) 밝은 그림 시대. (1887~ 1900년)


빛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밝고, 때로는 폭발적인 채조를 보이게 된다. <해변의 카니발>, <성 안토니우스의 고난>으로부터 <브뤼셀 시에 입성하는 그리스도> <벼락을 맞고 추락하는 반역의 천사> 에 이르러 앙소르 예술의 가장 힘찬 절정기를 맞게 되었다. 이 작품들을 보면, 그가 이미 20세기에 들어선 후의 미술 운동, 포비즘, 표현주의, 쉬르 리얼리즘을 선취한 선구적 의의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앙소르라고 하면 누구나 가면과 해골이 생각날 만큼 양자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가면은 그의 어린시절에 항상 신변에 있었다. 가장을 한 지인이나 가족이 기괴하고 무서운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거나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소년 앙소르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그는 가면이 지닌 심리적 의미를 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회화 표현에 있어서의 방법론과 가능성을 검토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가면은 색조의 신선함, 날카로운 표현, 화사한 장식, 커서 예기치 못할 몸짓, 비계획적인 동작, 정교한 소란을 의미한다." 앙소르는 또한 "나는 가면이 지배하고, 일체 폭력, 빛과 광휘로 분장된 고독한 영역에 나 자신을 즐겁게 감금했다." 고 말한다. 그는 가면에 사로잡힘과 동시에 가면을 사로잡아 마침내 독창적인 가면극의 세계를 전개해 나간다.


인간의 얼굴이 가면이 되고, 또는 가면이 살아 있는 얼굴이 되는 앙소르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야릇한 착각이 일어난다. 새침한 얼굴은 그 밑에 거짓, 위선, 음모, 허영, 갖가지 치사한 욕망을 숨기고 있다. 산 얼굴이 바로 가면이며 여러가지 정념과 욕망을 단적으로 성격 표현한 가면이 실은 인간의 참된 보편적 얼굴이 아닐까. 세상 사람들의 조소, 악의에 시달린 앙소르에게 있어서는 아마 가면극에 의해서만 진실을 폭로할 수 있는 실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겋ㅅ은 리얼리즘인 동시에 표현주의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쉬르레알한 영역에 들어선 회화가 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가면들을 주역으로 하여 회화의 드라마를 구성함으로써, 앙소르는 비애와 유머로 가득차고, 일면에서는 유희적이면서 강력한 표현 수단을 터득했다. 그 표현을 뒷받침하는 그의 가면 철학은 고스란히 그대로 허식과 얼굴이 복잡하게 교착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거슨 가면과 함께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해골과도 통한다. 인체의 허식인 피부와 살을 모조리 벗기면 남는 것은 해골뿐이며 그것이야말로 인체의 본연의 모습이다. 이것은 가장 리얼한 인간의 모습이며 또한 동시에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목을 멘 사나이의 시체를 서로 빼앗는 해골>, <가면과 죽음> 그 밖의 작품에는 가면과 해골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두개골로 이따금 그의 화면에 놓인다. 이 해골과 죽음의 주제는 중세 이래의 유럽 미술의 전통의 하나이며 16세기에 브뤼겔이 집대성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19세기에는 낭만주의와 함께 더욱 성해지고, 19세기 말의 상징주의에 인계된다. 따라서 앙소르가 해골과 죽음을 채택한 것 자체는 색다른 것이 아니지만 그가 그 주제에 부여한 내적 필연성의 의미, 드라마와 아이러니로 가득 찬 회화 표현의 신선함과 독창성은 남달리 뛰어난 것이었다.


 앙소르는 신약 성서를 즐겨 읽었는데, 그 속에서 세속적 인간의 어리석음을 발견했으며 그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거부당하고, 박해받는 그리스도에게 깊은 공감을 푸었다. 그는 크리스찬이었던 것은 아니나 성서의 드라마 속에서 대중에게 학대를 받으면서 최후의 승리인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는 주인공인 인간 그리스도에게 감동했다. 세인들의 조소를 받고, 동료 화가들에게마저 거절 당하고, 비평가에 의하여 책형에 처해진 앙소르로서는 그리스도가 남같이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데다 장발이며 수염을 기르고 있던 앙소르는 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리스도를 그릴 때, 그는 분명히 자기의 간접적 자화상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최고의 인물의 드라마를 통하여 앙소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수하려 했고, 통렬히 풍자하려 했고, 그와 동시에 자기를 찬양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마 이것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단적인 행위라고 간주당한 것도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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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이 난 가면, 1883년, 캔버스,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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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무도회, 1918년, 캔버스,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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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니발, 1920년, 캔버스,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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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모, 1890년, 캔버스, 유채>




+) 후기


그의 화업의 전기와 중기를 합쳐서 약 20년, 1900년 경부터 시작된 후기는 길어서 약 반세기에 이른다. 그런데, 훌륭한 작품도 있으나 긴 기간에 비해서 아주 적다. 화면의 긴밀도가 떨어지고 채색은 담담해지며 터치는 유동적이다. 하자루츠의 말에 따르면 <투명한 그림의 시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생각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앙소르의 예쑬이 차차 이해를 받고 평가를 받기 시작한 일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견해와는 반대일지 모르나 그를 그처럼 제작 몰두하게 한것이 주위의 공격에 대한 <반격의 투지>였다면 공격이 갑자기 약해짐에 따라 저항과 투지도 쇠퇴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그것의 반대경우가 일반적이겠지만 즉 <가혹한 공격으로 앙소르가 받은 상처는 의외로 커서 그는 마침내 기진맥진한 것이다.>라는 설도 유력하다. 그는 이따금 갑자기 우울에 잠기기도 하고 홀로 절망의 눈물을 흘렸다고 친구는 말한다.



1892년 그는 은밀한 결의를 품고 런던으로 할머니를 찾아갔는데 그녀는 아들이 신분이 낮은 벨기에 처녀와 결혼한 것을 용서하지 않았기에 그를 냉대할 수 밖에 없었다. 이 해에 누이동생이 중국인과 결혼했는데 얼마 후 누이동생의 남편은 떠나가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893년 초조해진 앙소르는 화실에 있는 모든 작품을 고작 8,500프랑에 팔아 버리려 했으나 친구들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살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20>이 해산 된 것도 이때였다.


앙소르가 예술상으로는 용감했으나, 외계에 대처하는 한 인간으로서는 뜻밖에 취약했고 의지력도 약한 것을 루소의 가족들이 격려하고 지원해주기도 했지만 루소 교수도 늙어서 겨울마다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지내게 되었고 친구였던 교수의 아들은 젊은 아내를 여의고, 한 때 실명까지 하게 되어 지난날의 <자극적이고 불손한> 서클의 분위기는 이미 바랄 수도 없었다. 이것은 앙소르에겐 유일한 고무와 영감의 원천을 상실한 것과 같은 타격이었다. 그는 브뤼셀에 자주 가지 않게 되었으며 오스텐드에 있는 집에서 어머니, 누이 동생, 백모들로부터 생활 무능력자라고 비난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이상과 같은 여러가지 사정이 쌓이고 쌓인 결과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19세기도 끝나기 시작한 무렵부터 앙소르에 대한 평가가 호전하기 시작한다. 1896년 브뤼셀의 벨기에 왕립 미술관이 전기의 작품이지만 <등잔 닦은 소년>을 사들였고 1899년에는 파리의 '라 프륨'지(誌)가 앙소르 특집을 간행했는데, 베르하렌, 메테를링크, 데몰데와 그밖의 사람들이 기호(寄縞) 하고 있다.


 또한 앙소르는 피리를 불고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문필에도 뛰어나서 발레판토마임 <사랑의 곡조>(1막 2장)의 시나리오를 쓰고, 작곡을 하고, 의상과 무대 장치의 디자인까지 하고있다. 그는 종합적인 예술적 자질의 소유자라고 말하고있다.
 
"그렇지, 모든 감각은 거룩한 기쁨에 참가한다. 맨 먼저 눈, 다음에 미각, 그리고 촉각, 맨 나중에 더욱 겸허한 본질을 지닌 마음이다." 앙소르의 오관은 서로 교류하고, 혐동하고, 그의 마음이 온갖 감각을 통합하여 회화를 창조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1949년 11월 19일, 89세의 장수를 누린 후, 제 2차 세계 대전 중의 폭격 속에서도 떠나지 않고 있던 고향 오스텐드에서 사망하여 교외의 마리아케르크에 묻혔다.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를 연상케 하는 성대한 장례였다고 한다. 그는 평생 동안 결혼하지 않았는데, 28세 때부터 반려였던 여자친구이며 그가 <시레느(바다의 요정)>라고 애칭으로 불렀던 오귀스타 보갈츠도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2007년 2월 1일자 포스팅.
다시 읽어봐도 예술가는 아무나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Posted by june|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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